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문단 편집) == 생애 == [[1913년]] 18세의 나이로 [[사관후보생]]으로 올라우 제 4 유사르연대에 배속된 그는 칼세르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후 [[1914년]]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육군 [[대대장]]으로 종군하였는데, 그러다가 사촌형 붉은 남작을 따라 [[1917년]]에 할레 항공학교로 전속한다. 그곳에서 그는 뒤늦게나마 항공 기술을 습득한 후, [[1918년]] [[3월]]에 종형제이던 붉은 남작의 11전투기 중대(일명 Jasta 11, 즉 야스타 11)에 배치되어 [[파일럿]]로 활약하며 1차 대전 당시에는 8기를 격추한다.[* 참고로 붉은 남작 문서에도 나오지만 붉은 남작의 죽음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사망일 당일에 볼프람도 출격했지만 당시엔 초보 파일럿이어서 전투를 위에서 관전하고 있었고, 이 때 캐나다 출신이자 역시 초보였던 윌프리드 "웝" 메이 대위의 공격을 받았다. 볼프람이 공격받는 것을 본 붉은 남작은 싸움에 끼어들었고, 볼프람은 무사히 도주했다. 붉은 남작은 메이를 계속 추격했고, 이를 보고 메이의 친구였던 로이 브라운 대위도 끼어들었고, 지상에 있던 호주군까지 대공사격으로 가세하면서 난장판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붉은 남작은 (아마도 대공사격에 맞아)사망했다.] 그러다가 그는 [[독일 제국]]의 패전을 맞이하게 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1920년]], [[중위]]로 전역한다. 전역 후에는 하노버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었고 졸업한 후 [[독일 국방군]]에 [[재입대]]한 그는 소위로 11기병연대에 배치되었는데, [[아돌프 히틀러]]가 극비리에 진행하던 [[루프트바페]] 창설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가한다. 이후 그는 자식이 없었던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1855년)|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양자가 되었다. [[1929년]]에 [[대위]]로 승진한 리히트호펜은 [[4월]]부터 [[로마]]에 있던 독일 대사관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이탈리아 공군을 연구하라는 히틀러의 특명을 받고 이탈리아의 공군 장성들과 친분을 쌓으며 나날이 이탈리아의 [[전투기]], [[폭격기]], 공군 전술 등을 익히게 된다. [[1931년]], 독일로 귀국하여 [[1933년]] [[10월]]에 꿈에도 그리던 루프트바페의 재건이 성공하여 육군 11기병연대에서 다시 공군 항공성 개발국으로 전속한다. 참고로 1차 대전 때는 전투기 조종사로 근무했으나, 2차 대전 때는 폭격기 조종사로 전향하게 된다. [[1936년]] [[중령]]이 된 그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콘도르 군단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그는 [[1937년]] [[4월]]에 [[스페인 제2공화국|스페인 공화파]]의 한 도시에 [[Ju 87]]과 [[He 111]]로 무차별 폭격을 가해 일반 시민 수백 명을 한 순간에 사망시킨 엄청난 만행을 저지르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하고 악명 높은 '''[[게르니카]] 공습'''. 게르니카의 참상에 대해서는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에도 아주 잘 나타나 있으며 루프트바페가 민간인에게 저지른 고의적인 [[전쟁 범죄]] 중 하나였다.[* 다만 게르니카 공습이 고의적인 전쟁범죄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바스크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도로 및 교량 등을 파괴하는 것이 목적인 전술적 폭격이라는 의견도 있다.[[https://networks.h-net.org/node/35008/reviews/45973/kilduff-corum-wolfram-von-richthofen-master-german-air-war|참고]]] 이 공로로 그는 [[11월]]에 [[소장(계급)|소장]]으로 진급되었고 스페인 내전이 종료되자 다시 독일로 귀환한다. 그러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특별항공군 사령관으로 [[폴란드 침공]]에 종군했다. 그는 개전 직후 비무장한 소도시 비엘른을 폭격하였다. 그후 근접항공지원을 지휘하며 바르샤바를 소이탄과 고폭탄을 이용해 폭격하여 2만 5천여 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폴란드 침공이 끝나고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자 특별항공군은 제8항공군단으로 개칭되고 여기서도 근접항공지원을 지휘하였다. 훗날 [[1940년]] [[7월]]에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자 영국 공습에 총력을 기울이는데, 여기서도 그는 [[Ju 87]]과 [[Ju 88]], [[He 111]] 등으로 영국의 도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민간인들을 향해 거침없이 소이탄을 투하했다. [[파일:d568863f6b1dd4b504e7ee8e9791929b.jpg|width=400]] ▲ 상급대장 시절 [[1941년]] [[4월]]에 [[크레타 섬 전투|크레타 섬 강습 작전]]의 지휘관으로도 참가했는데, 그 작전에서도 역시 크레타 섬을 거의 재기불능 상태 일보 직전까지 만들어 놓았고, 같은 해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나치당]]이 명명한 '''열등한 짐승'''인 [[소련]]을 향해서는 더욱 거침없이 무차별적인 민간인 폭격을 가행했다. 그러다가 그 [[전범|공로]]를 인정받아 [[1942년]] [[2월]]에 [[상급대장]]으로 승진, 16일에는 무려 [[원수(계급)|원수]] 계급이 주어졌다. 이는 유례 없는 초고속 승진이었다. 그가 공군 원수가 됐을 때의 나이가 47세로, 이는 당시 루프트바페 내에서는 물론, 독일 국방군 전체 내에서 '''최연소''' 원수였다. 그러나 그도 점점 짙어지는 패전의 기색 앞에서는 별 수 없었다. [[1943년]] 말에 이르어 [[연합군]]이 물량 공세로 루프트바페를 완전히 압도하자 리히트호펜은 더 이상 활약할 수 있는 전장을 잃고 말았고, [[1944년]] [[10월 27일]]에는 평소에 지병으로 앓고 있던 [[뇌종양]]의 급작스러운 발병으로 [[의병 제대]]한다. [[1945년]] [[5월 8일]] 종전이 되자 그는 [[미군]]의 포로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뇌종양으로 사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